와인을 만드는 법? 생각보다는 간단하다. 포도를 사 와 알맹이만 떼어낸 뒤 깨끗이 씻는다. 표면에 묻은 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거나 하나하나 알을 닦아준 뒤 으깬다. 뜨거운 물로 소독한 용기에 으깬 포도를 설탕과 함께 넣어 버무려준다. 미리 물로 녹인 와인용 효모를 넣고 한 번 더 섞어준 뒤 햇볕이 없는 서늘한 곳에 두고 1차 발효한다. 하루 두어 번 정도 저어주며 가스를 뺀다. 대략 7~10일 정도 가스가 나오지 않으면 망에 과육을 걸러준 뒤 2차 발효하고 침전물을 걸러준 뒤 두 달 정도 숙성시키면 완성.이라고 인터넷엔 그렇게 나와 있었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직접 만든 것을 연인에게 선물로 주거나 함께 즐기는 것. 그걸 와인으로 정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 와인을 받을 사람은 연인은 아니지만. 이걸 선물을 하고 나서부터는 연인이 될 수 있다고 눈앞에 손질된 포도를 손으로 으깨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날은 와인데이에 맞췄다. 단 걸 좋아하니 레시피보다 설탕을 더 넣었다. 한 병은 일반 포도, 다른 한 병은 샤인 머스캣으로. 비주얼은 아무래도 파는 것보단 탁하고 예쁘진 않겠지. 싫어하려나. 혹시 모르니 인기 있는 와인 몇 병을 사놔야겠다. 마시고 기뻐할 상대를 떠올리면 준비하는 과정은 즐겁기만 하다. 편지도 써야지. 글씨는 안 이쁘지만. 내 진심을 담아서.
열심히 준비했다고 보답을 해준 걸까. 와인은 잘 만들어졌다. 맛을 보니 괜찮았다. 혹시 몰라 사둔 와인과 직접 만든 와인을 구분해 포장했다. 편지도 스티커를 붙이기 전 마지막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이 이상한 것 같아 다시 쓰기 위해 새로운 편지지를 꺼내왔다. 먼저 쓴 편지 내용을 고쳐쓰기 위해 그 위에 필요 없는 내용엔 줄을 긋고 쓰고 싶은 내용을 추가해서 썼다.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니 전에 쓴 것보단 나은 것 같아 새로운 편지에 옮겨 내용을 적었다. 글씨가 이쁘지 않아 천천히 그러다 보니 손에 힘이 들어가 꾹꾹 눌러썼다. 다 쓰고 나서 마지막_최종_찐최종으로 확인을 한 뒤 봉투에 넣어 귀여운 동물 캐릭터 스티커를 붙었다.
분명 이벤트. 선물. 성공적. 이 돼야 했었는데… 예약한 장소가 아닌 아침부터 준비하느라 엉망진창이 된 자취방에서 의자에 앉는 것도 아닌 바닥에 쭈그려 앉는 작은 식탁에서 마주 보게 된 걸까. 자세히 말하자면 기니까 요점만 말하자면. 예약한 레스토랑이 하필이면 1시간 전에 건물 정전으로 준비한 재료가 전부 상해 음식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내용의 예약 취소 문자를 상대와 만나고 나서 확인했다. 다른 곳이라도 갈까 찾아봤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빈자리가 없었고 그렇게 점점 다른 곳을 찾다 상대에 입에서 나온 한마디에 지금의 장소에 오게 된 거다.
그나마 거실 쪽이 덜 지저분해서 다행이었다. 방은 더 엉망이니. 낮은 여름 날씨처럼 더웠지만, 아침, 저녁은 겨울이 온 듯 추웠다. 거실마저 더러웠으면 방 치워야 한다고 이 추운 날씨에 밖에서 기다리게 할 뻔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그때 청소하는 습관을 들일걸. 나중을 생각해서 내일부터, 오늘 저녁때라도. 상대를 보내고 나면 바로 청소하는 습관을 들이자. 일단 오면서 배달 앱으로 주문해놓은 음식을 기다리면서 먼저 준비한 직접 만든 와인 두병을 건넸다. 그 자리에서 바로 꺼내 와인을 이리저리 둘러보기에 먼저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가 했는데.
“진짜? 상호 대단하다. 그럼 두병이니까 하나는 지금 마실까?”
“예? 예… 컵 가지고 올게요.”
와인 잔이 없어 일단 찻장에서 캐릭터가 그려지지 않은 평범한 잔을 찾는 동안 초인종이 울렸고 배달이 온 건가 싶어 급하게 내가 받겠다며 가지러 나갔다. 봉투를 조그마한 식탁에 올려놓고 다시 컵을 찾으러 가니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먼저 세팅하고 올걸. 컵 2개를 꺼내고 아래에 있던 앞접시랑 수저도 챙겼다. 이미 세팅이 된 배달 음식 옆에 컵을 내려놓고 앞접시와 수저를 조심히 앞에 놔줬다. 웃는 소리가 들리니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병 따는 소리와 함께 컵엔 녹색도 아닌 애매한 색의 와인이 따라져 있었다. 막걸리 같기도 하고.
“색 때문인지 막걸리 같다.”
“아냐. 색도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은데…”
“괜찮다니까? 상호야 짠하자.”
내민 컵에 내 잔도 살짝 부딪혀 높은 소리가 났다. 술 마시면 긴장이 풀리겠지. 음식도 있으니까 천천히 페이스 조절하면
되는데… 머리가 아파 눈이 떠졌다. 속이 이상해 물을 마시려 몸을 일으켰는데 옆에서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컵이 내밀어졌다. 고맙다고 인사하니 이어지는 목소리가 너무 익숙해 확 정신이 들었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평소에 자주 입던 후드티를 입고 있는 상대가 보였다. 뭐야. 갑자기 오한이 들어 몸이 떨렸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상대 역시 당황한 얼굴이다.
“상호야 네 허락도 안 받고 옷을 꺼내 입어서 미안해.”
“우리 뭔 일… 있었어요?”
“음… 그… 어제 상호 네가 취해서…”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내 옷에”
아. 설마.
“다가 ...내서.”
“아. 네?”
“그래서 내가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네 걸 허락 없이 입었어. 미안해.”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옷에다가…라고 생각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급히 입을 틀어막으니 괜찮냐는 걱정하는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그러다 다급히 옆에 있던 숙취해소 음료를 뚜껑을 따서 쥐여준다. 직접 사 온 걸까. 음료를 확 들이켜고는 미안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분명 저번에 맛을 봤을 땐 이 정도로 취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런 상황이 온 걸까. 일단 옆에 있던 폰을 들어 레시피를 다시 확인했다. 천천히 읽어보던 중 맨 마지막에 적힌 주의사항을 발견했다. 와인 제조 시 설탕을 많이 넣으면 달아지는 만큼 도수가 세진다고. 왜 이걸 이제야 봤을까.
“상호야. 나 집에 들러서 옷 갈아입고 출근해야 할 것 같아. 어제 입은 옷이 아직 덜 말라서 그런데 이 옷 입고 가도 될까?”
“흐어어. 네. 죄송해요.”
“괜찮아. 취하면 그럴 수 있지. 옷은... 세탁해서 다음에 만날 때 줄게.”
“네에...”
“그래. 상호는 오늘 쉬는 게 좋겠다. 머리 아프면 저기에 한 병 더 있으니까 마시고. 같이 해장하러 가고 싶은데...”
“택시 불러줘요?”
이미 불렀다는 말과 함께 선물로 준비한 와인을 넣어놨던 종이가방에 제 옷을 챙겨 넣고선 몸을 일으킨다. 저 종이가방에 나 때문에 엉망이 된 옷이 들어있단 말이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에 괜찮다며 함께 밖에까지 나왔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나올 수 있는 내 옷차림을 보니 상대에게 더 미안해졌다. 저 종이가방 안엔 편지도 들어있었을 텐데. 물 때문에 젖으려나. 차라리 젖어 내용이 알 수 없게 번져버리는데 났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씩 어제 했던 내 행동이 하나씩 떠오른다. 와. 진짜 가지가지 했네. 기상호. 이거 미친 거 아이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려 양손을 들었다가 손등으로 옆 사람을 툭 쳤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해 밝아진 하늘. 대화는 한참 전에 끊겨 부지런한 새가 우는소리만이 들려왔다. 안 그래도 어색해 조용한데 멀리서 다가오는 전기 차인 택시마저 조용히 다가왔다. 어색하게 서 있는 남녀가. 그중 한 사람은 제 사이즈가 아닌 옷을 입고 있으니 택시 기사는 분명 오해하겠지. 그게 아닌데. 택시 문을 열어 조심히 가라 말했다. 말을 안 하고 있던 탓에 잠긴 목소리가 나오자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래. 상호야 해장 꼭 하고. 너 와인은 마시지 않는 게 좋겠다.”
“죄송해요.”
“갈게. 다음에 봐.”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숙였다 든 뒤 문을 닫아줬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손 흔드는 행동에 나 역시 손을 펼쳐 들어 흔들었다. 점점 멀어지는 택시를 보며 손을 흔드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힘이 빠져 툭 손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거 망한 거 맞지? … 아니. 망했다. 그냥 망한 것도 아니고 아주 대차게 망했다.